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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먹방시대 공양을 생각하다] 1. 공양의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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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댓글 0건 조회 1,749회 작성일 22-05-1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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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고리인 음식, 탐식·과식 열광 속 ‘쾌락의 도구’로 전락


음식 섭취 통제력 잃으면 ‘폭식 장애’…먹방 열풍엔 개인화 된 사회도 한 몫 

뭇생명 연기적으로 이어주는 음식의 본래 가치 사라지고 소비재로만 인식

공양에 담긴 절제·나눔, 수행의 출발이자 굶주린 이웃 향한 자비심의 실천


무수한 존재들을 연기적 관계로 인식하는 불교의 음식관은 지구 한 편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음식물쓰레기와 탐식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무수한 존재들을 연기적 관계로 인식하는 불교의 음식관은 지구 한 편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음식물쓰레기와 

탐식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지난 2019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발표한 ‘소비자행태조사’에 보면 우리나라 10~20대 연령층이 가장 많이 보는 온라인 동영상 콘텐츠가 ‘먹방’인 것으로 나타났다. 

바야흐로 ‘먹방’ 전성시대다. 개인이 자신의 입으로 무엇을 먹든지, 또는 얼마만큼을 어떻게 먹든 간에 남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온·오프라인 미디어에서 넘쳐나고 있는 먹방을 접하면서 과연 개인의 자유영역으로만 놔둬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먹방에서 음식을 대하는 공통적인 모습은 바로 ‘탐식’과 ‘폭식’, 그리고 ‘과식’이다. ‘미국 정신의학회(APA)’에서 출판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 보면 ‘폭식’을 정신질환으로 분류해 이를 ‘폭식장애(BED:Binge Eating Disorder)’라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먹기를 멈출 수 없거나 무엇을 또는 얼마나 많이 먹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느낌’을 갖고 음식 섭취에 통제력을 잃을 경우 폭식이 된다. 


이런 폭식과 식탐에 대해 ‘단테’는 그의 저서 ‘신곡’에서 아홉 지옥 중 세 번째 지옥에서 다루고 있다. 이 지옥은 폭식과 폭음, 중독에 빠진 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곳에는 죄인들이 오물과 배설물, 하수구 쓰레기물로 된 비를 맞으며, 그 빗물로 이루어진 흙탕물 속에서 돼지처럼 뒹굴면서 지옥의 개 ‘케르베로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물어뜯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교에서도 식탐과 관련된 대표적인 캐릭터로 ‘아귀(餓鬼)’가 있다.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보면 아귀는 모두 36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 중 ‘식토아귀(食吐餓鬼)’는 생전에 혼자서만 미식을 즐기면서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았던 사람이 그 과보를 받은 것으로서 먹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토해내기 때문에 아무리 먹어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또 ‘식기아귀(食氣餓鬼)’가 있는데 이 또한 전생에 혼자서만 음식을 즐기며 가족에게는 냄새만 맡게 했던 사람으로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의 향기 이외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고 한다.


이처럼 의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식탐과 폭식, 과식의 집합체인 ‘먹방’이 오늘날 각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 불평등화 속에서 자기성취 기회를 잃어버린 청년세대의 대리만족과 공감, 혼밥혼술 문화 향유층의 증가, 개인 미디어의 발달 등이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20년 우리나라 1인 가구 수는 전체 가구의 31.7%를 차지했다고 한다. 혼밥혼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먹방이 성행한다는 양자 간의 상관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계의 단절과 개인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먹방을 통한 대리만족은 달리 말하면 인간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단절되고 개인화된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비단 특정 세대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먹방의 다른 문제점은 없을까? 무엇보다 음식을 음식이 지닌 본래 가치에 주목하지 않고 오로지 감각적 쾌락의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음식은 본래 또 하나의 생명체로서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존재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음식을 땅과 공기, 햇빛과 물 등 전(全) 지구적 운동과 우주적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연기적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나 먹방은 이러한 음식의 가치를 다루지 않는다. 그저 흥미의 소재로만 이용되고 배설될 뿐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 대부분은 당연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는 왜 음식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까? 영국의 경제학자 멜서스는 1793년 발표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명제는 20세기 초까지 인류가 당연히 받아들였던 보편명제였다. 이러한 멜서스의 명제는 20세기 급격한 식량 증산이 가능해진 ‘녹색혁명’에 의해 잊혀진 이론이 되어 버렸다. 녹색혁명 이후 인간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대규모 경작지에 단일 품종을 각종 화학비료와 농약을 이용하여 재배하는 플랜트 농업과 공장식 축산을 급속히 확대해가면서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즉 풍요의 시대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식량과 음식은 그저 소비의 대상일 뿐이고 화폐와 등가교환되는 상품이라고 여겨왔다. 과연 1000원을 주고 산 두부 한 모가 과연 화폐 1000원의 가치와 똑같을까? 두부 한 모가 주는 먹는 즐거움, 포만감, 생명 에너지원의 유익함이 정말 1000원어치 밖에 안될까? 화폐가치와 음식이 등가교환된다는 착각 하에 이루어진 이 풍요의 시대는 여러 가지 심각하고도 무서운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생태안정성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유전자변형작물의 개발, 작물재배지 확보를 위한 대규모 열대우림의 파괴, 조류독감과 아프리카 돼지열병, 그리고 광우병 등 각종 가축 질환을 야기하고 있는 공장식 축산 등등. 


전문가들은 현재 인류가 생산하고 있는 식량은 온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1.5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런데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의하면 2015년 기준 지구상의 영양실조 인구는 8억1500만명,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칼로리를 기준으로 하면 약 15억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대부분 지구 북반부에 위치한 선진국에서 생산된 식량의 3분의1은 음식쓰레기로 버려지고 있고 남반부 빈곤국들에서는 음식이 없어서 인간이 버려지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고 부조리한 모습이 먹방의 이면에 가려진 우리의 진실인 것이다. 앞서 말한 맬서스 주장이 현재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인구와 식량의 상대적 비율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인간의 절제된 삶을 요구했던 그의 호소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귀 기울일만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잘린 카워드는 음식의 모양과 색깔, 형태 등을 극도로 강조해 식욕을 자극하는 것을 ‘음식 포르노(Food Porno)’라고 이름 붙였다.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먹방은 오늘날 대표적인 음식 포르노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인간이란 그저 먹는 바의 것”이며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였던 사바랭은 “당신이 먹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라고도 했다.


두 사람의 삶과 발언의 배경은 극과 극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과 음식이 갖는 상관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먹방에 공감하는 사람의 삶은 곧 먹방스러운 것이다.


불교에서는 음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초기경전 ‘상윳따니카야’에 보면 사막(혹은 황야)을 건너는 부모와 아이에 대한 비유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게 되었다. 어느덧 양식이 다 떨어졌고 사막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부부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그 살과 고기로 연명하며 사막을 건너게 되었는데 수행자들은 음식을 대함에 있어 마치 그 부부가 대한 아들의 살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음식을 대함에 있어 그 소중함과 최소의 쓰임을 생각하라는 이 가르침은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준엄하게 묻고 있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사찰에서 ‘발우공양’을 할 때 염송하는 이 ‘오관게(五觀偈)’를 보면 불교의 음식관이 잘 나타나 있다. 연기적 존재로서 음식에 대한 인식과 각성, 음식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가짐, 연기되어 있는 무수한 존재들에 대한 회향으로 귀결되는 오관게는 우리가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발우공양에서 ‘공양’은 원래 불보살님과 수행공동체인 ‘상가’에 음식과 의복, 약 등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일과 그 일을 돕는 것 또한 공양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사분율’에 보면 출가수행자에게 올리는 밥 한 덩이의 공덕이 무량함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열반경’에 보면 굶주리는 자, 병든 자, 가난하고 외로운 자를 돕는 것이 곧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같다고도 하셨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나누는 일은 둘이 아닌 하나의 행위라고 할 때, 한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오늘날 쉼 없이 탐식과 폭식, 과식을 선전하고 있는 먹방을 보면서 연기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 불자들이 참다운 공양의 의미를 어떻게 실천할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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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팀장